어느 농장에 어떤 나무가 얼마에 있는지, 우리나라엔 그 데이터가 없습니다. 조경 설계자였던 안정록 대표는 전국의 나무 농장을 직접 돌며 그 빈칸을 채웠고, 루트릭스는 1년 만에 매출을 20배로 키웠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그가 만든 동아리 이름은 'DMZ 생태 탐사대'였습니다. 파주 접경지에서 자란 안정록 대표는 매달 민간인 통제구역에 들어가 여름엔 식생을, 겨울엔 조류를 조사했죠. 그 기록으로 쓴 논문이 환경 올림피아드 수상으로, 다시 청소년 세계 기후변화 포럼 한국 대표로 이어졌습니다. 고려대 환경생태공학부를 거쳐 하버드 건축대학원에서 조경 설계 석사를 마쳤고, 2021년 김유겸 대표와 함께 나무 데이터 스타트업 루트릭스를 세웠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나무의 가격

국내 나무·조경 산업에는 로우 데이터가 없습니다. 어디에서 누가 어떤 나무를 키우고 그 가격이 얼마인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라는 겁니다. 조경을 담당하는 부처조차 명확하지 않습니다.
데이터가 없으니 가격은 크게 출렁입니다. 그 빈자리는 사람이 몸으로 메워 왔습니다. 기존 중개업자들은 1년에 20만km를 운전하고 하루에 전화를 400통씩 받으며 나무를 연결해 줬다고 합니다. 배달 앱은 전국 음식점을 묶어 주고 쿠팡은 출처도 모를 물건을 집 앞까지 가져다주는데, 나무는 왜 안 될까 🤔 — 안 대표가 붙든 질문입니다.
DMZ 생태 탐사대에서 하버드까지

세계 기후변화 포럼에서 유니세프가 50개국 학생 150명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자연 환경 활동을 하게 되었느냐고요. 끝까지 아무도 자기 생각과 같은 답을 하지 않자 그가 마지막에 손을 들었습니다. "자연이라는 게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보호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이 말을 하지 않는구나 — 그게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고 합니다.
조경학은 1850년대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태어난 학문입니다. 산업화로 도시가 빽빽해지자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는 도심 속에 자연이 있어야 한다고 봤고, 그 100만 평 공원을 만들며 하버드에 조경 설계(Master of Landscape Architecture) 과정이 처음 개설됐습니다. 조경학도에게 하버드가 각별한 이유죠.
정작 하버드에서 그가 깨달은 건 다른 쪽이었습니다. 좋은 설계 회사에 들어가도 큰돈을 벌지는 못한다는 것. 학비도 생활비도 스스로 감당하던 그는 1학년 때 이미 알아챘습니다. 자기가 좋아한 건 설계가 아니라 조경이라는 산업 자체였다는 것도요.
결혼식 가는 차 안에서 들은 이야기

창업 전, 조경 현장을 보는 후배와 결혼식장에 가는 차 안에서 무심코 물었습니다. 현장에서 뭐가 제일 불편하냐고. 답은 이랬습니다. 소나무를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 하루 종일 돌려 가며 예쁜 각도를 찾아 심는데, 그게 며칠씩 걸린다고요.
돌이켜 보니 자신도 설계할 때 실재하는 나무가 아니라 온라인에 돌아다니는 3D 모델과 이미지만 박아 썼습니다. 그러니 도면대로 시공될 리가 없었던 거죠. 이 산업의 문제는 나무 데이터에 있다 — 그 데이터를 자기가 다 모아 버리면 되겠다고, 그때는 멋도 모르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고객이 원한 건 깊이가 아니라 넓이였다
처음 승부수는 라이다(LiDAR) 스캐닝이었습니다. 농장을 통째로 스캔해 나무 한 그루의 형상을 정밀하게 담아 그대로 팔면 큰 유통 플랫폼이 되리라 봤죠. 기술 개발까지 마쳤습니다.
그런데 고객을 만나 보니 원하는 건 딴 것이었습니다. 한 나무의 어마어마하게 디테일한 정보가 아니라 가격·규격·수량이 명확하고 사진 정도만 있으면 산다는 겁니다. 공원이나 아파트 조경 하나에 50가지, 100가지가 넘는 품목이 들어가거든요. 지금까지는 소나무는 소나무 중개인, 잔디는 잔디 중개인에게 따로 물어 가며 구해 왔습니다. 이들이 바란 건 한 농장의 깊은 데이터가 아니라, 웬만한 정보를 가진 농장을 많이 아는 회사였습니다.
그래서 방향을 틀어 전국을 뛰었습니다. 인천 검단의 한 정원에 들어갈 직경 70cm짜리 포인트목을 전국을 뒤져 찾아 준 것이 첫 거래였고, 이어 대형 카페 앞에 심을 왕벚나무 12주를 납품했습니다. 생산자도 고객, 구매자도 고객인 마켓플레이스라 한쪽이 쌓이면 다른 쪽으로 넘어가는 식으로 굴러갔습니다.
3년을 기다려야 도는 사이클

조경은 사이클이 긴 산업입니다. 설계가 실제 시공으로 이어지기까지 3년, 5년, 길게는 7년이 걸리는 프로젝트도 있습니다. 아무리 영업을 다녀도 돌아오는 답은 "내년에 시공 들어가면 연락 주겠다"였죠.
그 구간을 버티며 남해까지 가서 배를 타고 섬에 들어가 나무를 보고 왔습니다. 산·바다·섬을 훑으며 생산 데이터를 쌓고, 반대편에서는 구매자를 찾아다녔습니다. 3년 차쯤 되자 사이클이 돌아왔습니다. 2024년 하반기, 매출이 전년 대비 거의 20배로 뜁니다.
AI와 로보틱스 다음 시대

스케일업을 위해 2025년 상반기부터 시리즈 A 라운드를 돌았습니다. 하지만 2025년은 AI와 로보틱스의 해였고, 플랫폼으로 분류된 루트릭스는 번번이 밀렸습니다. SaaS로 포장할까 고민도 했지만 무엇으로도 설득되지 않았습니다. 4~5월에 시작한 라운드가 12월까지 커밋 하나 없이 흘렀고,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그는 말합니다.
IBK 창공 데모데이 최종 발표 날 아침, 그는 오프닝 멘트를 바꾸기로 합니다. 500명이 넘는 청중 앞에서 준비한 IR 대신 질문을 던졌죠.
그리고 그 자연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나무, 그 데이터를 다루는 회사가 루트릭스라고 이었습니다. 발표 뒤 연락이 몰렸고 막바지에 오버부킹이 났습니다. 라운드는 그렇게 닫혔죠.
강남 빌딩을 무너뜨리고 나무 한 그루

돈을 많이 벌면 무엇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그는 강남에 빌딩을 하나 사서 다 무너뜨린 다음 나무 한 그루만 심고 싶다고 답합니다. 금싸라기 땅의 빌딩을 헐고 나무 한 그루를 심는 회사를 보면, 나무가 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 저러나 한 번쯤 생각하게 되지 않겠냐는 겁니다.
루트릭스의 미션은 "아름다운 자연의 감동이 더 많은 대중의 일상이 되게 하자"입니다. 좋은 공간을 많이 본 사람이 훗날 결정권자가 되었을 때 좋은 결정을 내릴 거라는 믿음에서 출발했다고 하죠. 지금은 하버드에서 배운 대로 설계해도 99% 이상 설계 변경이 납니다. 우리나라에 어떤 나무가 있는지 몰라 늘 쓰던 나무만 쓰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말미에 그가 좋아한다며 꺼낸 말이 오래 남습니다. "일단 죽지 않으면 성장한다." 창업하며 작은 실패는 하겠지만 그 실패로 죽지는 않고, 오히려 다음 시도의 에너지가 된다는 겁니다. 회사가 망해도 내가 죽는 건 아니니까요. 나무의 시간을 다루는 사람다운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